중앙일보 칼럼 8: 사라져 가는 종이책

몇 달 전 출국할 때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국내 항공사가 새로 지은 비즈니스 클래스 라운지에 들어갔다. 비즈니스 클래스 표가 있어서는 아니고 미국 가는 비행기를 워낙 많이 타다 보니 마일리지가 쌓여서 이제 그 라운지 쓸 수 있게 되었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면서 심심해서 벽에 붙은 책장에 고전으로 보이는 책을 구경하러 갔다. 다행히 직접 책을 뽑기도 전에 깨달았던 건 그게 가짜 모형책들이었다는 거다. 어쩐지 어떻게 책들이 다 똑같은 크기일까 의아했었다. 그 순간에 갑자기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이제 사회에서 ‘책은 소품에 불과한 존재 됐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제외하고 주로 그 라운지 공간을 쓰는 사람들은 부유하고 상류층에 속할 거다. 따라서 가구와 조명, 내부 요소들은 가급적 ‘있어 보이게’ 꾸몄을 거다. 그러나 그 책은 가짜다. 그건 책이 있어야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의식은 남아 있지만 책을 볼 사람이 별로 없어졌다는 의미가 된다.

뉴스에서 누군가 ‘전문가’나 ‘교수님’의 자격으로 나올 때 거의 항상 수백 권의 책이 꽂힌 책장 앞에서 촬영한다는 것도 생각났다. 몇 년간 아무도 안 읽어서 그 책 위에 먼지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책이 꼭 있어야 똑똑해 보인다는 의식 때문이다.

서울 중심가에 있는 한 서점도 원래 1, 2층 다 책만 있었는데 어느 해인가 반은 문구와 기념품 가게로 바뀌었다. 그 다음 해는 그것마저 반으로 줄어서 이제 책 진열대는 4분의 1만 남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만 해도 지하철에서 ‘타임’지를 읽는 20대, 소설을 보는 30대, 한자로 된 고전을 읽는 어르신 다 볼 수 있었는데 이제 지하철에서 단 한 권의 책도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됐다. 나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신문을 사서 뉴스를 읽거나 사전 들고 다녔고 지하철에서 만화나 책을 봤다.

이제는 뉴스, 영한사전, 잡지, 만화까지 다 휴대전화기로 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그 느낌이 종이책하고는 사뭇 다르다. 스마트폰 보급율이 높아지면서 정보력이 많이 올라간 것은 맞지만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집중력이 상당히 떨어졌다고 한다. 굳이 연구해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전화기로 책을 볼 수 있긴 있지만 몇 분 이상을 보는 게 대단한 의지력이 필요하다. 자꾸 관심이 가는 SNS 앱이 바로 옆에 있으니까 사실상 책은 몇 초만 보고 쪽지와 댓글, 게시물 봤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다가 끝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이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스마트폰을 산 친구가 전화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고 ‘책을 한시도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책을 많이 본다’는 의미를 지니는 ‘수불석권’이라는 말을 바꿔서 ‘수불석폰’이라고 놀렸다. 그러나 나도 다음 해에 스마트폰을 갖게 되고 나서 ‘수불석폰’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화면 안으로 흡수된 것처럼 보이는 젊은층을 보며 혀를 차던 어르신들까지도 이제 지하철에서 똑같이 사탕을 부수는 게임에 빠져서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역사적으로 항상 새로운 정보 매체가 나올 때마다 그 과도기에 있는 중년층은 비교적 어얼리어답터가 많은 젊은층을 보면서 ‘이제 우리는 망했다’고 걱정한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그래도 인류는 계속 생존했고 문명은 계속 발전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살고 있는 시대가 하필 종이책이 사라져 가는 황혼기라는 생각을 하면 슬프다.

자동차가 나왔을 때도 사람들은 이제 승마 문화가 완전히 없어지겠다고 걱정했다. 오늘날에도 말 타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걸 일상적인 일로 보는 사람은 없고 승마 잘하는 사람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머지 않아 우리도 종이책을 읽는 사람을 보면 ‘와 정말 신기하다!’라고 구경하게 될 것이다.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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