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장비는 천천히… (칼럼 7)

비싼 장비는 열심히 노력한 데대한 보상이지 출발점은 아니다.

요새 한국에서도 팟캐스트와 유튜브 문화가 널리 번져가면서 비교적 이른 2010년부터 이 분야에서 활동해 온 나에게 많은 분들이 같은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은 의외로 방송의 성격이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냥 장비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이다.

‘나도 마이클처럼 팟캐스트 만들고 싶은데 무슨 마이크를 사야 될까요?’ 아니면 ‘유튜브 채널 새로 열려고 하는데 동영상 찍으려면 무슨 사진기를 사야 할까요?’와 같은 질문들이다. 그러고 나서 지금 구매를 고민하고 있는 장비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하나같이 값이 엄청 나가는, 하나에 몇 백 만 원 정도 하는 프로급 장비들이다.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보니까 요새 인기 유튜버들이 다 이걸 쓰던데…”라고 덧붙인다.

그때마다 내가 ‘무엇에 대한 방송을 할 거냐’고 되물어보는데 돌아오는 답이 대체로 매우 막연하다. ‘뭐 이것저것’ 아니면 ‘아직 잘 모르겠네요’와 비슷한 답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서 ‘그럼 아직 첫 방송도 안 찍어봤고 방송의 방향이나 개념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첫걸음으로 제일 비싼 장비부터 사려는 건가’라는 말이 맴돈다.

사실 남들이 자기 돈을 어떻게 쓰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이러한 고급 장비 취득이 실속이나 실력보다 앞서 있는 현상을 보면 뭔가 순서가 뒤바뀐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너무 상식적인 말 같지만 어떤 분야의 일을 새로 시작할 때, 그 분야에서 순전한 초보자일 때는 프로급 장비가 아니라 초보용 장비를 사야 한다.

유튜브나 팟캐스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운동을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번지르르한 최신 장비를 구매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 같다. ‘나 테니스 배우기로 했다’고 말하고 바로 다음 날에 몇 십 만 원짜리 테니스 채 들고 나타난 사람이 내 주위에만도 몇 명이나 된다.

심심풀이로 등산 동아리 가입하겠다고 하고 ‘남들에게 뒤처지기 싫어서’라는 설명과 함께 최고급 등산복과 등산화로 중무장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무의미한 소비가 필수적인 것처럼 강조되고 광고와 선전으로 포화된 사회 속에서 살다보니 나타나는 하나의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프로가 돼야 프로급 장비를 산다는 말은 옛말이고 이제 ‘제대로 시작하려면 최고의 장비부터 갖추자’는 게 대세가 된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지금은 좋은 사진기, 렌즈와 마이크를 포함한 좋은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내 오디오 팟캐스트와 동영상 강의 연재 둘 다 첫 편부터 한 100편을 만들 때까지는 그냥 이동 전화기로 다 녹음하고 녹화했다. 방송 시작한 지 한 4년 정도 되어서야 휴대폰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하는 걸로 바꿨고 최근 들어 드디어 DSLR로 바꿨다.

구독자가 한 10만 명 되었을 때 ‘아 지금 내 방송을 듣는 사람이 축구 경기장에 들어가는 수와 비슷하구나’라고 깨닫고 그때서야 장비를 한층 개선하기로 결심했다. ‘노력하고 인정 받고 그 다음에 장비를 산다’는 게 내가 보기로는 맞는 순서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조급해서인지 장비-인정-노력의 순서로 거꾸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노력’ 단계에 도달하기도 전에 그만둔다.

이 문제에 대해서 왜 내가 이렇게까지 거부감이 드는 걸까 하고 반성해봤는데 어릴 때 우리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나는 클라리넷을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배웠고 예중, 예고, 예술대학교까지 진학했는데도 배운 지 한 10년이 되었을 때야 아버지는 나한테 좋은 악기를 사주셨다.
예고에 다닐 때는 수석 클라리넷 연주자였는데도 내가 연주했던 클라리넷은 중고 악기였고 뒤에서 연주하던 다른 아이들이 갖고 있던 악기 중에서도 제일 싸구려였다. 그때는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뜻이 이해가 간다.

그리고 록키 산맥 도시인 덴버에서 자란 나는 산소가 희박할 정도로 높은 산을 올라간 적이 많았는데 한번도 특별한 옷이나 장비를 갖추자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그냥 형과 함께 평소 학교에 갈 때 쓰던 베낭과 신발로만 산에 올랐다.

어쩌면 내 거부감에는 내가 갖지 못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부러움이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인기 팟캐스트 중에서 좋은 장비 때문에 성공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유명 화가 중에서도 붓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경우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무슨 도전이든 일단 몇 년 동안 열심히 해 보고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처음처럼 관심과 열정이 여전하다면 그때 장비를 사도 늦지 않을 것이다. 베란다에 내팽겨쳐진 장비에 먼지만 쌓여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말이다.

Micha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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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비싼 장비는 천천히… (칼럼 7)

  1. 목수는 연장탓을 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이 경우에 딱 들어맞는 것 같습니다.
    마이클쌤의 의견에 100%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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